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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이후 출생한 미술가들을 소개 해두었으며 출생일 순으로 정렬 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미술의 흐름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선생님 2006-09-30 16:02 조회 수 5753 댓글 수 1


 

1819. 6. 10 프랑스 오르낭~1877. 12. 31 스위스 라투르드펠즈.

프랑스의 화가, 사실주의 운동의 선도자.
[개요]

쿠르베는 당대의 낭만주의 회화에 반발하여 일상적인 사건들을 그림의 주제로 택했다. 인물들을 빽빽이 그려넣은 어두운 배경의 대작 〈화가의 작업실 The Artist's Studio〉(1855)은 당시 미술계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1860년대부터 그의 작품들은 좀더 감각적이고 다채로워졌다(→ 사실주의).


쿠르베가 그린 유화 〈화가의 작업실〉(1855) : 그림을 그리고 ...
프루동, Gustave Courbet가 1865년경에 그린 유화(부분), 파리에 있는 ...

[초기생애와 작품]

쿠르베는 프랑스 동부에서 부유한 농부인 아버지 엘레오노르 레지와 어머니 실비 쿠르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왕립 중학교와 브장송미술대학을 다닌 뒤 1841년 명목상으로는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에 갔다. 그러나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대가들의 그림들을 연구하는 데 더욱 진지하게 몰두했다. 그들 부자는 서로의 의견을 매우 존중했는데, 쿠르베가 지방법률가보다는 화가가 될 작정이라고 아버지에게 말하자, 아버지는 "만일 도중에 그만두게 된다면 그것은 내가 아니라 너일 것이다"라고 하면서 동의했다. 또한 필요하다면 땅과 포도원, 집까지 팔겠다고 덧붙였다. 재정적인 불안에서 완전히 벗어나자 청년 쿠르베는 미술에만 완전히 몰두할 수 있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리베라 등 17세기 스페인 화가들의 그림들을 모사함으로써 숙련된 기교를 얻은 그는 여러 번 낙선하다가 1842년에 그린 자화상 〈검은 개를 데리고 있는 쿠르베 Courbet with a Black Dog〉로 마침내 25세가 되던 1844년에 왕립 아카데미의 후원으로 당시 프랑스에서 해마다 열리는 유일한 공공 미술전람회인 살롱전에 입선했다. 그뒤 몇 해 동안 그의 작품이 비전통적인 양식과 대담한 주제 때문에 살롱의 심사원들에게 3번이나 거절당했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출품했다.


[사실주의의 태동]

1848년의 혁명은 제2공화국을 이끌면서 예술에 큰 영향을 미친 새로운 자유주의 정신을 낳았다. 살롱의 전시회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튈르리 궁으로 옮겨졌다. 쿠르베는 1849년 그 전시회에 작품을 전시했으며, 그의 초기 작품은 비평가들과 일반 대중으로부터 상당한 찬사를 받았다. 1849년 그는 파리에서의 피곤한 생활을 벗어나 건강을 되찾기 위해 오르낭에 있는 그의 가족을 방문했는데, 다시 그의 고향마을에 감화되어 2점의 뛰어난 그림인 〈돌 깨는 사람들 The Stone-Breakers〉·〈오르낭의 매장 Burial at Ornans〉을 그렸다. 1849년에 그린 〈돌 깨는 사람들〉은 비천한 노동을 하고 있는 두 인물을 황폐한 시골을 배경으로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다음해에 그린 〈오르낭의 매장〉은 농민의 장례식을 묘사한 대형 그림으로, 실물 크기의 인물들이 40명 이상 등장한다. 이 두 그림은 신고전주의나 낭만주의의 좀더 절제되고 이상화된 그림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것들은 귀족적인 인물이 아닌 초라한 농민들의 삶과 정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쿠르베가 농민들을 미화하지 않고 대담하게 있는 그대로를 묘사한 사실은 미술계에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새로운 사실주의파의 선도자]

시인인 샤를 보들레르와 사회철학자인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등 당대의 작가 및 철학자들과 친하게 사귀었던 쿠르베는 새로운 사실주의파를 이끌었는데, 이것은 결국 동시대의 다른 운동들을 압도하게 되었다. 그가 사실주의를 발전시키게 된 결정적인 요인들 중 하나는 그가 태어난 지방인 프랑슈콩테와 이 지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들 중 하나이자 그가 태어난 곳인 오르낭의 전통과 관습에 대한 일생 동안의 애착이었다. 그는 잠깐 스위스를 방문한 뒤 오르낭으로 돌아가서 1854년 후반에 거대한 캔버스화를 그리기 시작해 6주 만에 완성했는데, 그의 미술 생애에 미친 영향들을 온갖 사회 계층의 인물들로 묘사한 우의적인 그림인 〈화가의 작업실〉이 바로 그것이다. 이 그림에서 화가 자신은 자부심을 드러낸 채 모든 인물들을 주재하면서 누드 모델에게는 등을 돌린 채 풍경화를 그리고 있다. 1855년의 만국박람회에서 심사원단이 이 그림을 거절하자 쿠르베는 친구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그 전람회장에서 가까운 곳에 사실주의 작품 전시회를 열어 자신의 작품들을 전시했다. 그의 전시회는 첫번째 사실주의 회화 그룹전이 되었다. 이 시도는 실패했으며, 화가인 외젠 들라크루아만이 그의 일기에서 쿠르베의 대담성과 재능을 칭찬했다. 쿠르베는 1867년 다시 한번 그룹전을 시도했으나 또다시 실패했다.

1856년 쿠르베는 독일을 방문하여 동료 미술가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3년 뒤 40세가 된 그는 자신의 조국에서는 여전히 혹독한 비평을 받았지만 이제 명백히 미술의 대가가 되었으며, 전통적인 회화 양식들이 예술적 착상에 장애만 될 뿐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서 등을 돌린 새 세대 화가들의 지도자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쿠르베는 온갖 장르의 작품을 만들었다. 여성 찬미자였던 그는 매우 따뜻한 느낌의 관능적인 그림들에서 여성의 누드를 예찬했다. 훌륭한 초상화들도 그렸지만, 무엇보다도 프랑슈콩테를 찬양해 그곳의 숲·샘·바위·벼랑 들을 그리면서 거기에 불멸의 생명을 불어넣었다. 1865년에는 에트르타와 도빌, 트루빌 등 제2제정시대에 인기가 있었던 휴양지들의 벼랑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대기의 흐름과 폭풍우가 몰아치는 하늘을 주의 깊게 관찰해 일련의 해안 풍경화들에서 폭풍우치는 장면을 성공적으로 묘사했다. 이 그림들은 미술계를 놀라게 하고 인상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여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뒤 인상주의는 대상을 엄격한 윤곽선들로 형상화하기보다는 대상에 부딪쳐 반사된 광선 및 색채를 그려 더욱 놀랄 만한 감각적 표현을 성취했다.


[정치활동]

1870년 프랑스-독일 전쟁이 일어나 제2제정이 무너지면서 제3공화국이 선포되었다. 1871년 3월 18일 파리 코뮌(파리에 세워진 혁명정부)이 수립되어, 프랑스에 체류중인 독일인들 및 나폴레옹 3세에게 계속 충성하는 베르사유군과 싸울 것을 다짐했다. 파리 코뮌 사람들은 베르사유군이 독일과 휴전 조약을 맺은 것을 불명예스럽게 여겼다. 그무렵 미술가동맹의 회장으로 선출되어 박물관들을 다시 열고 해마다 열리는 살롱전을 주관할 임무를 맡은 쿠르베는 코뮌의 혁명적 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박물관들을 여는 대신 중요한 공공기념관들, 특히 세브르 자기공장과 퐁텐블로의 궁전을 보호하기로 결정했다. 파리는 그당시 독일군의 계속적인 폭격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파리 코뮌의 과격한 행위들에 놀라 5월 2일 사임했다. 파리 코뮌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대군을 기념하는 방돔 궁전의 기둥을 없애기로 결의하고 5월 16일 그 결정을 실행했다. 그러나 5월 28일 파리 코뮌은 베르사유군에 의해 무너졌으며 6월 7일 쿠르베는 친구의 집에서 체포되었다. 그 기둥의 파괴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군사법정에 서게 된 것이다. 그는 그 기념물이 상징하고 있는 군국주의에 대해 종종 혐오감을 나타냈기 때문에 비록 그 파괴 행위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지만 선동자로 고발되었다. 속죄양이 필요하던 차에, 기둥 파괴에 실질적인 책임이 있지만 영국으로 달아난 사람들과 쿠르베 자신의 항변에도 아랑곳없이 그가 임의로 선택되었다. 그는 6개월의 형을 선고받음과 동시에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의 수반인 아돌프 티에르의 중재로 500프랑이라는 최소의 벌금형을 받았다. 처음에 생트펠라지 감옥에서 형을 치르는 동안 중병에 걸려 파리 근처의 진료소로 옮겨졌다. 석방되자마자 그는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오르낭으로 갔다.

1872년 티에르가 사임하자 보나파르트를 지지하는 국회의원들은 다시 쿠르베의 재판을 열어 그를 상대로 그 기둥의 재건축에 드는 비용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의 전재산과 그의 그림 모두가 압류되었으며, 금화 50만 프랑의 벌금형이 내려졌다. 그는 벌금을 낼 수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를 떠나는 것밖에 다른 대안이 없었으므로 1873년 7월 23일 국경선을 넘어 스위스로 들어가 플뢰리에라는 작은 도시에 정착했다. 그는 다시 활동을 시작했지만, 프랑스와 너무 가까워서 불안을 느낀 나머지 처음에는 브베로 갔다가 다시 라투르드펠즈로 가서 거기에서 봉포르(좋은 안식처)라는 그의 처지에 어울리는 이름을 가진 허름한 여관을 구입했다. 육체적·정신적으로 매우 쇠약해진 그는 그곳에서 58세의 나이로 죽었다. 쿠르베의 명성은 그가 죽은 뒤 계속 높아져갔다. 그의 비방자들은 종종 그의 정치적 신념이 관용과 연민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그의 사회주의에 기초하여 그의 미술을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그뒤의 여러 근대 미술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후세대의 화가들에게 새로운 기법보다는 완전히 새로운 예술관을 제공했다. 즉 그림의 목적은 예전의 유파들이 주장해왔듯이 현실을 아름답게 꾸미거나 이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확하게 모사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쿠르베는 회화에서 상투적인 수법과 인위적인 이상주의, 낡은 양식들을 없애버렸다.

R.J. Fernier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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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Portrait
(검은 개를 데리고 있는 쿠르베)



파이프를 물고 있는 남자



The Sleeping Spinner



그레고와르 아주머니



푸르동의 초상, 1853년



The Sleep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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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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